시간때우기

시간때우기 | 유시민 <항소이유서> 타이핑

ICeBeRG. 2021. 3. 17. 10:10

 

 

남는 시간에 뭐라도 생산적이고 유익한 활동을 할 수 있는게 없을까 고민하다

유명한 책들 타이핑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도 좋고 시도 좋고, 뭐든.

 

그래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타이핑 해 본 유시민님의 <항소이유서>.

 

항소이유서

유시민

 

 

알라딘 등 이북을 제공하는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항소이유서>를 전자책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http://aladin.kr/p/zoDzH

 

 

워드 빈 페이지에서 여백 설정은 건드리지 않은 완전 기본 상태에서

폰트만 좋아하는 스타일로 변경하고, 폰트 크기는 10pt로 타이핑 했더니

무려 A4로 11장 반이 나왔다.

 

와... 이걸 어떻게 손으로 쓰셨지.

 

 

 

인상깊었던 문장들과 

처음 보거나 모호했던 어휘들은 

하이라이트로 표시해 보았다.

 

 

 

 좋았던 문장들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 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선전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도 무방합니다.

 

현 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 정권이 말하는 ‘새 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을 분칠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 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인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 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 명의 가짜 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 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 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 이거는 방송에서도 언급이 많이 되었던 부분인 거 같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에야 아, 이 글이 굉장히 문학적이구나를 깨닫게 해줬던 문장이다.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 

그래서 다시 한 번 쭉 읽어봤다.

 

 

 그리고 찾은 굉장히 감성적인 표현들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의 어느 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 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 삼는 생활

 

 

이거 무슨 시의 한 구절 아닌가 싶었던 문장들이었다.

물론 이 부분들은 항소이유서의 후반부에

좀 더 나긋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표현들이긴 하다.

 

 

 

 어휘  

애소(哀訴)
슬프게 하소연함.

문맥 안에서 그 뜻을 파악할 수는 있었는데, 어휘 자체가 너무 낯설어서 뜻을 찾아보았다.

읍소(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하소연함.)가 좀 더 많이 쓰이고 익숙한 표현인 것 같은데,

하소연의 강도로 보면 읍소 > 애소 인 듯.

 

 

 

배태(胚胎)
1. 아이나 새끼를 뱀.
2. 어떤 현상이나 사물이 발생하거나 일어날 원인을 속으로 가짐.

이것도 대충 의미 파악은 가능했으나 낯섦을 넘어 완전히 처음 본 것 같은 단어였다.

수태(아이를 뱀. 또는 새끼를 뱀.)와 비슷한 뜻인 것 같은데

국어사전 상에서 유의어로 배태-수태는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배태가 가진 의미가 더 깊다.

2번의 뜻으로 쓰일 때 굉장히 멋있는 듯.

 

 

 

방기(放棄)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함.

 

이거는 뭔지는 알겠는데 갑자기 정확한 뜻이 궁금해져서.

유의어로 연결되어 있는 '방치'가 더 익숙하긴 하다.

방치로 가보면 방관-좌시-방임과 의미가 연결된다.

다 익숙한데 방기는 왜 유난히 낯설지....

 

 

 

은전(恩典)
예전에,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

 

이건 완전 몰랐던 거! 처음 본 거!

은으로 만든 동전 같은거나 알았지, 나라에서 베푸는 혜택이 은전인 줄은 처음 알았다.

새로운 어휘의 발견, 아주 뿌듯하다.

 

 

 

 

 

회사에서 심심할 때,

할 게 없을 때,

좋은 글 타이핑하는거 좀 괜찮은 거 같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이틀 걸렸음.